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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ITchosun.com | 날짜:2002년 08월 12일
회사원 김기도(35)씨는 얼마 전 아내에게 중요한 전화를 걸려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집 전화번호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데다가 전화번호가 입력된 휴대전화마저 집에 두고 나온 때문이었다. 김씨는 “결국 회사 인사부에 우리집 전화번호를 물어봤다”고 말했다.
화려한 디지털시대의 이면에서 신종 증후군 ‘디지털 치매’가 급속히 번지고 있다. 휴대전화와 컴퓨터, PDA 같은 디지털 기기는 인간 뇌 용량을 확장시킨 발명품이라고 각광받았지만, 그 그늘에서 두뇌 능력은 쇠퇴 위기를 맞고 있다. 일본에선 최근 이같은 증상을 ‘IT 건망증’ 또는 ‘IT 멍청이’라는 신종 정신질환으로 분류했을 정도다. 당연히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10대 후반~30대 중반 연령층에서 두드러진다.
‘전화번호 건망증’은 디지털 치매의 신호탄이다. 휴대전화가 거의 ‘생필품’처럼 쓰이면서 친구는 물론 가족 전화번호도 ‘단축키’로만 존재한다. 아내는 1번, 부모는 2번 식이다. 회사원 김원필(34)씨는 “나에게 전화할 일이 없다보니 내 휴대전화 번호도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 세상’은 평균 계산 능력도 떨어뜨리고 있다. 휴대전화 속에도 전자계산기가 들어앉아 아주 간단한 암산도 계산기에 의존하게 만든다. 계산기를 끼고 사는 이공계 학생·회사원 중엔 심지어 ‘1+1’이나 ‘2×2’ 같은 셈도 계산기를 누르는 사람이 많다. 배영(36·대학원 박사과정)씨는 “아주 간단한 계산도 전자계산기를 누르는 습관이 생겼다”면서 “머릿속에서 한 계산은 믿을 수 없어 계산기로 확인한다”고 말했다.
‘한자맹(漢字盲)’도 컴퓨터가 주도하고 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더 이상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치지 않는다. 옥편 한 권이 입력된 컴퓨터에서 ‘한자’ 키를 누르면 자동으로 원하는 한자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애창곡’ 역시 노래방 기기 없이는 부를 수 없는 신세다. 사람들은 이제 가사를 띄워주는 기계 없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 탓이다. 휴대전화의 ‘알람’ 기능은 약속시간이나 생일 같은 간단한 정보조차 기계에 의존토록 만든다. 휴대폰 스케줄러 기능을 많이 이용하는 대학생 이종하(25)씨는 “기차시각을 휴대전화에 입력해놓았다가 알람을 듣지 못해 기차를 놓친 적이 있다”고 했다.
‘디지털 치매’는 기계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창의적 뇌 운동량이 격감해 생긴다. 최근 일본 ‘고노 임상의학연구소’는 “기억력은 반복적 훈련이 필요한데 각종 디지털 기기 때문에 이런 뇌운동이 사라지고 있다”면서 “이런 ‘IT 멍청이’ 현상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뜻하는 ‘전향성(前向性)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디지털 기기가 뇌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기억을 저장하거나 지우는 방법도 달라졌다. 대학생 최유강(28·한동대)씨는 일기, 메모, 사진 등 일상의 기억들을 CD롬과 디스켓, 웹하드(인터넷 상의 기억장치)로 각각 3번씩 저장하고 있다. 최씨는 “컴퓨터 에러로 데이터가 날아가버리면,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디지털 세대는 실연의 아픔도 ‘메모리 청소’로 지운다. 대학생 노연주(22)씨는 “남자 친구와 헤어진 뒤 그간 주고받은 E메일과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와 음성메시지를 깨끗이 지워버렸다”고 말했다.
이같은 ‘디지털 치매’는 인간 창의력이 기계에 종속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예고한다. 실제 “종이에 글을 쓰면 머리가 둔해지고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연세신경정신과 손석한 원장은 “뇌의 정보 저장 역할을 디지털 기기가 대신하면서 기억능력이 퇴화하고 있다”면서 “결국 디지털 기기 없이는 간단한 정보조차 기억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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